요새 마음을 비워야 한다는 메시지를 많이 접하곤 한다.
경치 좋은 곳에 좋은 시설을 갖춘 브랜드 치유센터가 마케팅을 펼친다.
동네 아파트 상가에 프랜차이즈 명상센터들이 들어서고 있다.
마음의 상처를 받는 이들은 점점 늘어나고 상처받은 이들은 마음을 치유시켜줄 곳을 찾고 있다.
마음의 상처를 치유해주고 온전한 마음으로 회복시켜주고자 하는 곳이 늘어난다는 것은
그자체만으로도 바람직하다.
정신 뿐 아니라 마음의 치료도 필요한 환자분께는 나도 주위의 마음치유센터를 방문하도록 권하기도 한다.
방문을 한 환자분들의 얘기를 들으면 대게 도움이 되었다고 한다.
그런데 뭔가 2% 부족하다고 말하는 환자분들도 꽤 많다.
그래서 도대체 뭐가 모자란 것이었을까 고민해보았다.
우선 마음을 비울 여유마저 없는 이들이 너무 많다는 생각이 들었다.
너무 괴롭고 불안하기에 아무리 좋은 곳에 가서, 아무리 좋은 치료자를 만나도 마음이 비워지지 않는 것이다.
그리고 “마음을 비우는 것만으로는 부족하다.
비운 마음을 열망과 행복으로 채워야만 한다.”는 생각도 들었다.
[결혼불능세대/김대호.윤범기/필로소픽]을 보면 과거에는 당연히 하던 결혼이
지금 20대, 30대에게는 열심히 해야 가능한 목표가 되어 버렸다는 내용이 나온다.
좋은 일자리는 점점 줄어들어 찾기 힘들다.
지루하고 사람을 지치게 만드는 원치 않는 일을 억지로 해야 한다.
자신이 좋아하는 일은 아니지만 막상 그 일을 그만두게 되면 더 나쁜 상황에 처할까 두렵다.
그러다보니 감정적인 여유가 없어진다. 생존을 걱정해야 하는 처지에 누군가를 사랑하고 관계를 이어가기란 힘들다.
결혼을 해서 가정을 이룬 30, 40대의 어깨도 무겁기는 매한가지다.
흔히들 샌드위치 세대라고 한다. 부모와 자식에 대해서 경제적, 사회적, 심리적 책임을 져야 한다.
막상 본인을 위해서는 아무것도 할 수 없다.
힘든 일을 계속하기 위해서는 휴식이 필요하다.
하지만 무거운 짐을 간신히 짊어지고 가다가 주저앉아 버리면 다시 일어나지 못하는 경우도 있다.
힘든 짐을 지고도 공포와 불안에 떠밀려 겨우겨우 힘겹게 발걸음을 떼고 있는 경우 한번 짐을 내려놓으면
그 다음에는 그 짐을 다시 떠안을 엄두가 나지 않는 것이다.
마음을 비우기 위해서는 마음의 짐을 내려놓아야 한다.
하지만 마음을 비우기 위해서 짐을 내려놓으면 다시는 그 짐을 짊어지고 일어나지 못할 것이라는 것을 알기에
짐도 내려놓지 못하고, 마음도 비우지 못한다.
전쟁에서 극도의 두려움을 느끼는 병사가 전투피로증에 걸리는 경우가 있다.
적을 향해 사격을 하는 대신 아무 곳에나 총을 갈기기도 하고,
전투에서 제 역할을 못하면서 동료에게 피해를 주기도 한다.
전투피로증에 걸리는 경우 조기치료가 원칙이다.
부대의 구호소에서 안정과 휴식을 취한 후 가급적 빨리 복귀하는 것이 원칙이다.
그런데 치료가 늦어져서 증상이 심해지진 상태에서 치료를 하게 되면 더디 회복이 되고 따라서
복귀 역시 점점 늦어진다. 어떤 경우는 영영 회복되지 않는다.
삶이 전쟁이 되는 순간 생존은 전투가 되어버린다.
그런데 전투에서는 달아날 수 있지만
생존으로부터는 달아날 수 없다.
죽지 않는 한 살아가야 하기 때문이다.
삶으로부터 스스로 달아나기 위해서는 생존을 포기해야 하고,
생존을 포기하기 위해서는 스스로 목숨을 끊을 수밖에 없다.
그렇기 때문에 아무리 힘들어도 살아남기 위해서 사회라는 전쟁터,
직장이라는 전쟁터, 가정이라는 전쟁터에서 버티어낸다.
마음을 비우기 위해서는 생존을 위한 전장에서 벗어나야 하는데,
한번 벗어나면 다시는 복귀하지 못할까 두렵기 때문이다.
생존피로의 초기에 치유를 시도했다면 비워진 마음이 저절로 건강한 마음으로 차올랐을 것이다.
자그마한 상처는 소독만으로도 낫는 것 같이 말이다.
하지만 이미 곪아서 감염이 된 경우는 종기를 째서 고름을 제거한 후 항생제를 사용해야 낫는다.
비워진 마음의 부분이 저절로 치유가 되지 않는 경우 누군가가 적극적으로 열정과 희망으로 빈 마음을 채울 때 치유가 된다.
즉 세상에 너무 지친 이들에게는 마음을 비우는 것만으로는 치유되기에 부족하다.
마음을 비우는 것과 열정과 희망을 채우는 것이 함께 이루어져야 한다.
과거에는 열정과 희망을 채우는 역할을 종교가 많이 했다.
성공하게 해달라고, 불행에서 벗어나게 해 달라고, 행복하게 해달라고 비는
신앙을 학교 다닐 때 기복신앙이라고 배웠었다.
신학자들은 영성을 추구하고 마음의 성숙을 목적으로 하는 신앙과 비교하면서
기복신앙을 한수 아래로 취급하고는 한다.
하지만 초월자에게 간절히 소원을 비는 것처럼 절망에 빠진 이들에게 힘이 되는 것이 없다.
그래서 과거에는 사업을 하다가 망해서 길거리에 나앉게 된 이가 기도원에 들어가서 단식을 했고,
자식이 병에 걸려서 생사가 달리게 되면 사찰에 가서 108배를 하면서 낫게 해달라고 소원을 빌었다.
아울러 정치도 일정부분 그런 역할을 담당했다.
가난에서 도저히 벗어나지 못하고 평생 아무 꿈도 이루지 못하고 살 것 같은 이들에게 있어서
노동운동, 농민운동, 시민운동은 목적을 이루기 위한 수단인 동시에 삶에 열정과 희망을 주는 샘이었다.
내가 이루지 못해도 우리가 이루어낼 수 있고,
우리가 이 시대에 이루지 못하면 우리의 자식들이 다음 세대에 이룰 것이라고 생각을 하면서
그들은 자신의 소외받은 삶에 의미를 부여했다.
하지만 현대사회에서 종교의 역할은 점점 줄어들고 있다.
루마니아 출신의 저명한 종교학자 머치아 엘리아데는 그의 책 [聖과 俗(성과 속)] 에서
세상을 성스러움과 세속으로 구분하고
인간이 인간으로서 살아가기 위해서는 성과 속이 내 안에서 서로 균형을 맞춰 활동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런데 미국의 신학자 하비 콕스는 1965년에 발간한 저서 [세속도시]에서
성스러움의 영역이 점점 세속화되어 감을 기술했다.
사람에게 희망과 열정을 줄 수 있는 힘으로서의 종교 영향력은 21세기인 지금 더 약화되고 있다.
구미에서는 1960년대와 1970년대, 우리나라에서는 1980년대와 1990년대 시민들이 연대하여
변화를 추구하고자 하는 동력이 가장 강력했다.
지금도 이슈가 있을 때면 세상을 변화하기 위해서 사람들은 뭉치고 행동한다.
하지만 그 영향력은 과거와 같이 지속적이지는 않다.
에너지는 강력하지만 삶을 변화시킬 정도로 그 열기가 오래 지속되지 않는다.
이 각박한 세상에서 행복하기 위해서는
너그러움과 여유만으로는 부족하다.
용기가 있어야 한다.
매일 매순간 무언가 선택을 할 때 행복을 우선에 두어야 한다.
아무 생각 없이 그저 하는 것으로는 부족하다.
마음을 비운다는 것은 생각을 비운다는 것이다.
세상이 나에게 주입한 생각을 비우는 대신 온전한 내 생각으로 그 부분을 채워야 한다.
내 희망을 잃지 않기 위해서는 꼭 내 희망이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더라도
누군가 소망하면 희망이 이루어지는 것을 봐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내 희망에 집착하는 것 못지않게 타인의 희망 역시 존중해야 한다.
진정한 삶에 대한 열정은 결국 사람으로부터 나온다.
현재 내 주위의 사람들에게 힘을 주고 그들로부터 힘을 받아야 한다.
어두운 동굴에 갇혀있는 이에게는 한줄기 햇살, 한줄기 바람이 생명줄이 되어준다.
생존자체가 투쟁이 되어버린 지금 아무리 사소하게 느껴지더라도
희망, 용기, 열정을 줄 수 있는 관계, 사람, 메시지를 소중하게 여겨야 한다.
그러한 사소한 것들이 마음에 쌓이다 보면 서로 끌어당기게 마련이다.
모래가 모여서 뭉치면 암석이 되듯이 자그마한 희망, 용기, 열정도 모아서 뭉치면 엄청난 힘이 된다.
그 힘이 당신을 생존전투에서 살아남게 하고, 전쟁 같은 삶에서
벗어나, 삶다운 삶을 살 수
있게 해줄 것이다.
[출처] 마음만 비운다고 행복해질까? :
최명기(부여다사랑병원장/정신과전문의/[트라우마 테라피]저자)|작성자 artpppe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