몇 년 전에 강원도에 병원평가를 위해서 갈 일이 있었다.
그 때 자신이 해돋이에 중독이 될 것 같다고 말하는 분을 만난 적이 있었다.
해가 뜨는 것을 볼 때마다 다른 세상에 있는 것처럼 느껴진다는 것이다.
그래서 매일 새벽에 일어나서 해돋이를 보기 위해서 해변에 간다.
전날에 술이라도 많이 마셔서 아침에 일어나지 못해 해돋이를 못 본 날은 하루 종일 뭔가 찜찜하다는 것이다.
날이 흐려서 어차피 해돋이를 보지 못할 것 같아도 혹시나 하는 생각에 가게 된다고 한다.
엄청난 비가 내려 해가 뜨는 것을 못 보는 것이 분명하지 않는 한
자신의 발길은 아침마다 해돋이를 보기 위해서 해변을 향한다고 한다.
해가 뜨는 것을 볼 때 자신이 위대해지는 것 같다고 그는 말을 했다.
엘리아데는
그의 책에서 인간의 종교가 자연에 대한 경외에서 시작되었다고 한다.
해가 뜨는 것을 보면서 말을 잊게 될 때,
하염없이 하늘을 보면서 생각을 잊을 때,
한밤 중 아무 불빛도 없는 자신도 모르게 하염없이 별을 세게 될 때
우리는 나 자신을 잊고 위대한 존재의 한 부분이 된다.
우리의 마음속에는 그런 위대한 순간을 경험하고 싶은 본능이 있다.
그런 위대한 순간은 공부를 많이 했다고, 노력을 했다고, 성공을 했다고 찾아오는 것이 아니다.
그런 점에 있어서 위대함이 찾아온다고 할 때
내게 떠오르는 얘기가 하나 있다.
원래는 중세부터 내려오는 민담인데 아나톨 프랑스가 단편소설로 소개를 해서 널리 알려진 [성모의 곡예사]다.
가난한 곡예사가 있었다.
어느 날 그는 우연히 수도원 원장을 만나서 자신의 힘든 삶에 대해서 말을 했다.
좋은 곡예사가 되었지만 아무도 그의 재주를 알아주지 않아 보러오는 이가 없는 것이다.
곡예사의 사정을 안타깝게 여긴 수도원장은 곡예사를 수도원으로 데리고 와서 받아준다.
수도사들은 저마다 가진 재능으로 성모를 모신다.
하지만 할 줄 아는 것이라고는 곡예 밖에 없는 그는 어떻게 성모를 위해 기도를 해야 하는 지도 모른다.
성경을 공부하고 기도문을 외는 시간에 그는 슬쩍 빠져가서 회당을 향한다.
이상하게 여긴 수도사들은 곡예사가 회당에서 무엇을 하는지 몰래 훔쳐보는데
곡예사는 성모 마리아상 앞에서 땀을 뻘뻘 흘리면서 칼을 돌리고, 접시를 돌리면서 재주를 피우는 것이다.
수도사들이 불경스럽다고 하면서 말리려는 순간 성모 마리아상이 움직이더니 곡예사를 향해 오는 것이다.
그러더니 곡예사의 땀을 닦아 주었다.
위대함이 그 순간 찾아온 것이다.
우리가 살아가면서 일상적인 삶에서 벗어난
위대함에 근접하게 되는 순간은 언제일까?
나는 누군가를 위해 희생할 때,
고난을 극복할 때,
고통을 인내할 때,
원수를 용서할 때,
허물을 벗고 자신을 초월할 때
우리는 위대함에 근접할 수 있다고 생각을 한다.
우선 모든 인간은 생존하고 싶다.
생존을 위해서는 자신의 이익을 최대로 생각해야 한다.
하지만 자신의 이익을 포기하고 누군가 무언가를 위해서 희생할 때 인간은 위대해진다.
희생의 대가로 무엇을 지불해야하는지를 온전히 인식한 상태에서 희생한다는 것은 인간이기에 가능하다.
끝없는 고난 속에서도 희망을 잃지 않고
고통의 늪에서 벗어날 때 인간은 위대하다.
아무리 작은 성취라도 고난을 극복하고 얻었다면 그것은 값지다.
하지만 고난이 동반되지 않은 성공은 그것이 제 아무리 큰 업적이더라도 위대함이 찾아오지 않을 수도 있다.
인간은 모름지기 고통은 피하고 싶다.
무언가를 위해서 고통을 인내할 때 인간은 위대해진다.
운동선수들은 기록을 단축하기 위해서 스스로에게 고통을 준다.
선수들의 승리가 값진 이유는 승리 그 자체 뿐 아니라 선수들이 인내했던 고통 때문이다.
힘든 투병을 통해서 병을 극복하고, 찢어지는 듯한 고통을 참아내고 재활에 성공한 이들에게는 위대함이 찾아온다.
나를 괴롭혔던 이에게 내가 당한만큼 고통을 주고 싶은 것이 인간의 본능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를 괴롭혔던 이를 용서할 수 있다면 그것은 위대한 행동이다.
그 용서가 자격지심에서 나온 마지못해하는 용서가 아니라
실제로 내가 상대방을 끝낼 수 있는 힘과 용기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이루어지는 경우
우리는 상대방을 이김으로서가 아니라 용서함으로써 위대해진다.
이런 과정을 거쳐 이전의 나라는 존재를 초월한 새로운 나를 느낄 때
우리는 나 자신이 자랑스러워 가슴이 벅차게 된다.
그것을 나는 허물을 벗는다고 표현을 한다.
과거의 나와 현재의 나는 동일한 존재이면서도 다른 존재인 것이다.
나는 하나의 삶이 아닌 또 다른 삶을 경험하고 살게 되는 것이다.
이렇게 삶이 변화하는 것을 느낄 때 우리는 경이로움을 느낀다.
나이가 들어서 늙어가는 것도 하나의 변화로 받아들일 수 있으며,
죽음 역시 나라는 존재가 또 다른 형태로 변화하는 것으로 용기 있게 받아들일 수 있다.
죽음을 겪어야만 하는 인생의 변화, 내가 다른 존재로 바뀌는 필연적인 계기로 받아들일 수 있다면
피할 수 없는 죽음이 다가올 때 단지 두려움과 공포에 사로잡히는 대신
그 동안 살아온 삶이 얼마나 위대하고 경이로웠는지 느낄 수도 있을 것이다.
이렇듯 진정한 위대함은
우리가 성공할 때가 아닌 비참하고 실패를 할 때 찾아오기도 한다.
위대함은 한번 올라가면 다시 내려오지 못하는 수준이나 경지가 아니다.
생각지도 않았을 때 뜻하지 않은 곳에서 찾아와 가슴을 멍 때리게 한다.
처음에 다가올 때는 성공 역시 위대함으로 나타날 수 있다.
하지만 성공 지켜야 할 무엇인가가 되는 순간부터 위대함은 성공으로부터 멀어진다.
우리가 경험한 위대한 순간은 때로는 잊히기도 하고 그 의미가 희석되기도 하지만
인생이 가장 힘들고 괴로울 때 다시 나타나 우리의 삶을 지켜준다.
[출처] 무엇이 삶을 위대하게 만드는가?
최명기(부여다사랑병원장/정신과전문의/[트라우마 테라피]저자)|작성자 artpppe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