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장의 어깨는 무겁다.
남자가 가장이면 부인, 여자가 가장이면 남편이 등에 매달려 있다.
양 어깨에는 자식들이 매달려 어깨를 짓누른다.
부모, 형제가 다리를 부여잡아 질질 끌면서 가야 한다.
그나마 매달려 있는 식구들도 모두 함께 땀을 흘리고 고생을 하면 다행이다.
하지만 그들을 안고, 끌고 가는 가장의 얼굴은 땀범벅인데
식구들은 저마다 하고 싶은 것, 갖고 싶은 것만 생각을 하면서 웃고 있는 경우도 있다.
레이몬드 카버의 대표작 중 한편인 단편소설 [코끼리]는 이런 가장의 괴로움을 잘 표현한다.
주인공은 이혼한 중년남자다. 그의 한 달 수입은 거의 전부다 가족들을 부양하는데 쓰이고 있다.
매달 1일마다 어머니에게 돈을 부친다. 자식 둘을 데리고 사는 딸에게 돈을 부쳐야 한다.
딸이 함께 살고 있는 놈팡이도 그 돈으로 먹고 살고 있다.
대학을 다니던 아들은 중퇴하고 독일의 대학에 가야한다고 하면서 비행기 표를 사기 위해서 돈을 달라고 한다.
게다가 이혼한 전처에게도 매달 돈을 부쳐야 한다. 이렇게 정기적으로 돈을 부쳐주는 가족이 다가 아니다.
직장에서 해고당한 동생은 황당한 사업을 한다고 하면서 돈을 꿔가고는 갚지 않는다.
자신에게 갚지 않는 대신 어머니에게 드리라고 하지만 그런다고 해놓고는 나 몰라라 한다.
너무나 힘든 그는 더 이상 나는 책임질 수 없다고 하면서 직장도 그만두고, 이름도 바꾸고, 호주로 떠나겠다고
가족들에게 편지를 보낸다. 그렇게 가족들을 모두 놓아버리기로 결심한 그는 꿈을 꾼다.
어린나이로 돌아간 자신이 아버지의 어깨 위에 무등을 타는 꿈을 꾼다.
코끼리 잔등에 올라탄 것 같이 그는 마음이 든든하다. 손을 놔도 하나도 무섭지 않다.
그 다음에 그는 전처, 아들, 딸과 함께 행복했던 시절의 모습을 꿈꾼다.
다음에는 자신이 자동차 유리창을 박살내며 아들을 죽일 뻔한 꿈을 꾼다.
마지막에 알코올중독자인 자신이 또다시 술을 입에 대는 꿈을 꾸면서 소스라치게 깨어난다.
자신이 술을 마셔서 무너지게 되면 가족들 모두 끝장이라는 생각이 들어서다.
그 다음 날 그는 그들이 모두 한때 자신이 사랑했던 소중한 가족이라는 생각을 하게 된다.
그리고 자신이 어려서 아버지로부터 받은 사랑을 떠올리면서 힘을 얻는다.
현재 이렇게 상황이 엉망이 되기까지는 자신의 잘못도 있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
그러면서 그는 가족들의 상황이 언젠가 다시 좋아질 것이라는 희망을 가지게 되면 다시 책임을 감당하기로 한다.
책임지는 일이 없다면 우리는 과연 깃털처럼 자유롭고 내가 원하는 일을 하면서 행복하게 살 수 있을까?
그렇지 않다.
책임질게 하나도 없는 사람처럼 외롭고 고독한 사람은 없을 것이다.
노숙자는 어떤 점에서 누구에게도 책임지지 않는 이, 아무것에도 책임지지 않는 이다.
하지만 그들을 보고 행복하다고 생각을 하면서 부러워하는 사람은 별로 없다.
과거에 인류는 남자는 목숨을 걸고 전쟁과 사냥을 하면서 성장을 했고,
여자는 출산을 통해서 성장을 했다.
남자가 전쟁에 나가서 목숨을 걸고 싸웠던 이유는 가족을 지키기 위해서다.
남자가 목숨을 걸고 사냥을 하는 이유는 가족들을 위해서 먹을 것을 구하기 위해서다.
여자가 아이를 낳는 이유는 당연히 가족 때문이다.
그러한 고난을 겪으면서 아이가 어른이 되는 것이었다.
어른이 된다는 것은 결국 책임이 늘어난다는 것이다.
책임을 지지 않으면 성장하지 못하고,
성장하지 못하면 여전히 아이처럼 남의 간섭을 받고, 남의 도움을 받고, 남의 지시에 따라 움직여야 한다.
아이들은 어렸을 때 자기 맘대로 할 수 있는 것은 하나도 없다고 생각을 한다.
늦잠자지 말라고, 과자 먹지 말라고, 텔레비전 그만 보라고
계속 잔소리를 듣는다.
그러나 막상 어른이 되었을 때 매일 늦잠 자고, 시도 때도 없이 과자를 먹고, 하루 종일 죽 때리면서
텔레비전이나 보고 산다고 해서 행복하지 않다.
그것은 쓸모없는 인생, 무가치한 인생이다.
한마디로 별 볼일 없는 인생이다.
책임지지 않으면 삶이 채워지지 않는다.
삶을 살다가 보면 바람이 불게 마련이다.
바람이 불게 되면 바람 부는 대로 날아다니는 삶이 부럽기도 하다.
땅에서 발만 떼고 바람에 날려다니면 세상없이 편하고 자유로울 것 같다.
발을 땅에서 떼지 못하는 이유는 온 몸을 짓누르는 책임의 무게 때문이다.
점점 거세지는 거센 바람을 옷깃을 올리면서 이리 피하고 저리 피해보지만 소용이 없다.
하지만 책임을 버리고 바람 부는 대로 날아다니는 삶이 자유로울까?
스스로는 깃털처럼 가벼운 삶이라고 착각할지 몰라도 결국 그 삶 역시 바람에 지배되는 삶이다.
바람 부는 대로 올라갔다 떨어졌다 하며 여기저기 부닥치다 보면 어느새 몸은 만신창이가 되어 버리고
마음은 넝마처럼 헤어진다.
부담처럼 여겨지는 책임이 사실은 가장의 삶을 지켜주는 버팀목이다.
힘든 바람에도 날리지 않고 묵묵히 자기할일을 하다보면 어느 새 바람이 잦아지면서 행복이 다시 찾아오게 된다.
가장의 어깨는 무겁다.
내려놓고 싶은 너무나도 무거운 짐이 그 무게의 원인이라고 받아들이면
나는 내 뜻대로 할 수 있는 것 하나 없는 갑갑하고 구속된 삶을 사는 것이다.
하지만 나의 삶을 든든히 지켜주고, 풍파에도 흔들리지 않게 해주는 갑옷이 그 무게의 원인이라고 받아들이면
마치 코끼리의 등에 올라탄 듯이 든든하게 여겨진다.
내가 책임져야 하는 이들은 더 이상 짐이 아닌 나를 지켜주는 무적의 갑옷이다.
[출처] 가장의 어깨를 짓누르는 책임감 :
최명기(부여다사랑병원장/정신과전문의/[무엇이 당신을 알하게 만드는가]저자)|작성자 artpppe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