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은
그것이 뭐가 되었든 애착하는 대상이 있을 때 살아갈 수 있다
살아가는 것이 너무 힘들어 훌쩍 어디론가 떠나고 싶을 때 내 발목을 잡는 것들이 있다.
얼핏 보면 그것들은 족쇄인 듯 하다. 하지만 내가 세상이라는 바다에서 떠다니지 않게 잡아주는 것들은
어떤 점에서 닻과 같은 존재이기도 하다.
누군가를 혹은 뭔가를 사랑하고 책임진다는 것은 이렇듯 양면성을 지닌다.
일을
사랑하는 것에 대해 얘기하기에 앞서 그 누구에게도 그 무엇에도 애착하지 않는 삶에 대해서 먼저 생각해보자.
신부님은 어떨까?
재산도 없고 결혼도 하지 않는다.
가장으로써 책임져야 하는 가족도 없다.
그러나 신부님에게는 책임져야 할 신도들이 있다.
무엇보다 하느님에 대한 애착이 있다.
그렇다면 스님들은 어떨까?
불문에 들어가면 원칙적으로 가족들과도 인연을 끊어야 한다.
물론 결혼도 안 한다.
불교에서 부처님은 우리를 해탈시켜주는 도구이지 우리의 소원을 이루어주는 신이 아니다.
선불교에서는 부처에 대한 애착을 버려야 해탈이 가능하다고 말하는 이도 있다.
그렇다면 스님들은 세상에 대한 애착 없이 살아가는 이들일까?
그러나 여전히 절이라고 하는 공동체에 대한 애착이 남는다.
사찰이 대중에게 많이 접근을 했다고 하지만
각각의 절은 여전히 속세에 대한 집착을 버리는 것을 목적으로 사는 이들이 모인 공동체다.
공동체의 삶은 서로에 대한 애착을 불러일으킬 수밖에 없다.
그런 점에 있어서
노숙인이야말로 애착 없이 살아가는 이들일지도 모른다.
주민등록번호도 상실되고, 가족들은 이미 사망하거나 이사를 해서 찾을 수 없는 노숙인은
어떻게 보면 세상에 속한 것이 없는 이들이다.
하지만 그들이 행복해보이지는 않는다.
삶에 대한 애착이 없는 가운데 살아가야 한다는 것은 어떤 점에서 살아있는 지옥인 것이다.
그러다 보니 노숙인들 중 일부는 술에 의존한다.
술은 현재의 고통을 잊기 위한 수단인 동시에 노숙인에게 남은 단 하나의 친구다.
기뻐도
술,
슬퍼도
술,
짜증나도
술,
배고파도
술,
마셔서 즐겁기도 하고, 괴롭기도 하고
술이야말로 그 들에게 있어서 진정한 친구다.
가족과는 헤어져도 술과는 헤어지지 못한다.
술에 대한 애착도 애착이라면 애착이다.
따라서 그들 역시 무언가에 애착을 가지면서 이 세상을 살아간다.
그렇다면
이제 세상에 대해서 애착을 가지고 살아가는 우리들에게 시선을 돌려보자.
대한민국에 사는 사람들이 가장 애착을 보이는 대상은 무엇일까?
아마도 그 중 하나는 집일 것이다.
1970년대 서구의 경제학자 한명이 공장에서 일하는 한국 여성노동자가 돈을 모아서 집을 사는 것을 보고
기적이라고 표현한 글을 청소년 잡지에서 읽은 기억이 난다.
그 경제학자는 여성 노동자들이 받는 월급으로 대한민국의 집값을 나눴다.
먹지도 않고, 입지도 않아야 가능하더라는 것이다.
그런데 대한민국의 여성노동자들은 불가능해 보이는 자기집 장만을 해내더라는 것이다.
그것이 가능했던 이유는 집이 단지 비를 피하고 발 뻗고 누워 자는 공간 이상의 의미를 지녔기 때문이다.
1970년대
우리나라 사람들에게 집이 가지는 의미는 남달랐다.
당시에는 주인집에 세 들어 셋방살이를 하는 이들이 적지 않았다.
당시에 집주인은 마치 상전처럼 군림했다.
사사건건 간섭을 했다.
조금만 세입자가 맘에 안 들면 “방 빼.”라는 말을 하기 일쑤였다.
귀가 시간, 물을 쓰는 것, 부엌 사용시간, 하다못해
화장실 사용까지 주인의 잔소리를 들어야 했다.
집을 소유한다는 것은 더 이상 누군가로부터 간섭받지 않는다는 것을 의미했다.
아울러 아직 절대적 빈곤에서 벗어나지 못하던 시절 자기 집을 장만했다는 것은
앞으로 굶어죽을 걱정은 하지 않아도 된다는 것을 의미 했다.
집이 갈망의 대상이었기에 산술적으로 계산이 불가능한 내 집장만이 가능했다.
그래서 어르신들은 나이가 들어서도 젊어서 자신이 장만한 집을 포기하지 않으려 하신다.
집에서 가급적 오래 살다가 돌아가시기를 원한다.
집은 독립과 안정의 상징이었기에 절대로 포기할 수 없다.
집을 포기한다는 것은 애써 얻은 독립과 안정을 상실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애착이 가지 않을 수 없다.
그렇다면
젊은 세대들은 무엇에 애착을 가지는가?
우선 사랑에 대해 생각해보자.
영화건 텔레비전 드라마건 노래가사건 사랑이 빠지면 안 된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모든 것은 조건화되어간다.
빈부격차는 심해지고 나 자신이 점점 초라해진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있는 그대로 나를 누군가 받아주는 것이 사랑이다.
세상이 나를 초라하게 만들면 만들수록 지고지순한 사랑에 대한 애착이 심해진다.
누군가를 사랑한다고 하지만 사실 사랑 자체를 사랑하는 것이다.
하지만
자신을 사랑해주는 누군가를 가지고 싶다고 갈망을 할 뿐이지 자신의 내적성숙에 대해서는 신경 쓰지 않는다.
사실 사랑을 사랑하는 이유는 자신의 불완전함 때문이기에
사랑을 위해서 자신이 더욱 성숙되어야 한다는 것은 받아들이기 싫은 것이다.
부모들은
자식에 대해서 애착을 보인다.
아버지는 자식의 과외비를 대기 위해서, 좋은 학군의 아파트에 전세를 얻기 위해서 직장에서 일을 한다
어머니는 하루 종일 어느 학원의 어느 선생이 잘 가르치는지, 어느 대학의 어떤 수시에 지원을 해야 할지 알아보는데
여념이 없다.
아빠는 돈을 벌기 위해서 자식과 얼굴을 마주치는 시간이 거의 없다.
엄마는 아이와 만나면 공부이야기 뿐이다.
부모는 이토록 아이에게 애착을 가지지만 아이는 부모를 대하는 것이 부담스럽다.
성적이라는 잣대에 의해 평가받는 존재에 불과하다.
그래서 아이는 자신을 있는 그대로 사랑해줄 것 같은 대상에 대해서 애착을 가진다.
그들이 아이돌스타다.
“부자 되세요.”가
한 때 인사로 유행한 나라인 만큼 돈에 대한 애착도 대단하다.
퇴임 후 살 집을 장만해야 하는데 어떻게든 나랏돈을 많이 빼내기 위해서 대통령도 머리를 굴렸던 나라다.
“대통령 사저는 나라 돈은 하나도 안 쓰고 내 손으로 짓겠습니다.”
한마디면 되는데 그 말을 직접 하지 않는다.
그러나 그러한 대통령의 모습은 어쩌면 우리 모두의 자화상이다.
돈이 없으면 사람대접을 받지 못한다.
돈이 없으면 결혼도 못한다.
돈이 없으면 사람도 못 만난다.
화려한 도시에서 돈이 없이 버티기 위해서 이를 악물고 알바를 한다.
가진 자들은 가진 자들대로 돈독이 올라 있다.
미래가 불확실해서 그렇다.
고령화 저출산으로 인해서 소비가 줄어든다
앞으로 몇 년이 지나면 수도권 공장에도 일할 사람이 없을 것이다.
일할 사람이 없어 텅 비게 될 공장을 지을 수도 없다.
앞으로의 수입이 예전 같이 않을 것 같기에 부자들 역시 불안하다.
그러다가 보니까 가진 사람은 가진 사람대로 없는 사람은 없는 사람대로 돈에 혈안이 되어간다.
그런데 우리가 정작 사랑해야 하는데 사랑하지 않는 것이 있다.
그것은 바로 일이다.
키스
자렛은 전 세계에서 가장 널리 알려진 피아니스트다.
그의 레퍼토리는 방대하다.
우리나라에서도 널리 알려진 My Song이라는 곡은 그가 리드한 째즈 쿼텟이 녹음한 곡이다.
째즈 피아노 트리오의 리더로서는 스탠더드 곡을 주로 연주한다.
바흐의 평균률을 전곡녹음 했다. 모차르트
피아노 협주곡을 오케스트라와 함께 녹음한 음반도 있다. 쇼스타코비치
같은 현대 작곡가의 음반도 냈다.
그리고 무엇보다 키스 자렛은 대규모 즉흥연주로 유명하다.
몇 만명이 운집한 가운데 한시간이 넘는 솔로 피아노 즉흥 연주를 한다.
그런데 키스 자렛은 40년이 넘게 ECM이라는 독립 레이블에서 음반을 발매했다.
미국이나 유럽의 메이저 레코드사가 거액의 계약금을 제시하고 스카우트를 하려고 해도 초지일관 ECM을 떠나지 않는다
간섭받지 않고 자신이 원하는 음악을 녹음하고 싶다는 것이다.
그는 ECM을 떠나지 않는 대신 바흐, 모차르트, 헨델, 쇼스타코비치, 째즈 스탠더드, 솔로
즉흥연주 등 마음 내키는 대로 녹음을 할 수 있는 자유를 얻었다.
키스 자렛은 음악을 사랑한다. 동시에 키스 자렛에게 있어서 음악은 일이다. 따라서 키스 자렛은 일을 사랑하는 사람이다
40년에
걸쳐서 수준급의 음반을 계속 내는 이는 많지 않다.
키스 자렛은 40년 전에도 정상이었고 지금도 정상이다.
음악과 같이 기복이 심한 예술분야에서 극히 드문 일이다.
몇 개의 정해진 레퍼토리를 연주해야 하는 클래식 연주자도 기복이 있다
키스 자렛이 음악도 잘하면서 동시에 일도 잘하기에 가능한 것이다.
대다수
사람들은 목적을 이루기 위해서 일을 한다.
그 목적은 먹고 살기 위해 필요한 수입일 수도 있고,
자기 집 장만일 수도 있고,
결혼일 수도 있고,
수입차를 모는 것일 수도 있다.
그런데 일을 목적으로 대하는 경우 목적이 이루어질 것 같으면 일하는 것이 흥이 나지만,
목적으로부터 멀어지게 되면 기운이 빠진다.
일의 목적이 목돈을 모으는 경우 직장에서 받는 월급은 똑 같더라도 내가 매입한 주식의 주가가 오르면 기운이 나고,
주가가 떨어지면 기운이 쪽 빠진다. 집주인은 올라가면 일을 할 때도 기운이 난다. 반면에 세입자는 집값이 올라가면 일을 할 때 기운이 쪽 빠진다. 집값이 떨어지면 집주인은 기운이 빠지고 세입자는 기운이 난다. 음악가도 따지면 음반 매출에 따라 음악에 대한 열정이 강해졌다 약해졌다 하는 셈이다. 그런데 만약에 키스 자렛이 그런 음악가였다면 절대로 40년 동안 꾸준히 음악활동을 할 수 없었을 것이다.
만약에
일을 사랑할 수 있다면 어떨까?
집값이 오르건 말건, 주가가 오르건 말건 일을 하는데 큰 영향이 없을 것이다.
가정에 안 좋은 일이 있으면 대체적으로 일의 능률이 떨어진다.
하지만 일을 하면서 고민을 잊는다는 사람도 있다.
내가 지금 하는 일을 사랑한다는 것은 인생에 안정감을 준다.
그런데 내가 지금 하는 일에 대해서 애착을 가지는 이는 별로 없다.
애착을 가지지 못하는 가장 큰 이유는 대가가 따르지 않기 때문이다.
안 그래도 쥐꼬리 같이 대우를 받는데 절대로 즐거워서 일을 한 수는 없다는 무의식적인 오기가 발동한다.
의과대학을
졸업하고 의사면허를 따면 환자를 진료할 수 있다.
하지만 내가 의과대학을 졸업하던 1992년에는 종합병원에서 인턴은 레지던트가 시킨 잡일을 하는 존재였다.
그런데 서울아산병원에서는 인턴도 주치의로서 환자를 책임지고 진료하는 경험을 해야만 한다는 취지로
많은 수는 아니지만 주치의로서 환자를 맡겼다.
보통 인턴들은 레지던트들이 하는 것을 그저 따라했다.
그런데 매일 밤을 새우는 힘든 인턴생활 속에서도 책임진 환자를 치료하기 위해서 밤을 지새워 공부하고
선배에게 물어보고 동료들과 상의하는 여자 동료가 있었다.
그녀는 자신이 맡은 환자가 죽기라도 하면 모든 것이 본인의 책임인 것 같아서 며칠 식음을 전폐했다.
의사생활을 통틀어서 나는 그렇게 환자에게 애착을 보이는 의사를 만난 적이 없다.
그런데
얼마 전 그 여자동료를 인턴을 마치고 처음으로 다시 볼 기회가 있었다.
전문의가 되고 봉직의로 취직을 하다 신도시 아파트 상가에 개원을 한 그녀는 나라에 대한 원망으로 말을 시작했다.
의료보험수가는 물가인상을 감안하면 매해 마이너스 인상이 된다.
알아서 잘하고 있는데 정부는 계속 이것저것 간섭한다.
환자 한명 한명 성실하게 진료하고 처방전만 발행해서는 환자를 많이 볼수록 손해만 더 커진다.
이러니 어디 환자 볼 맛이 나겠는가?
그녀는 폭풍불만을 쏟아냈다.
그녀의 마도 모두 나름 근거가 있었다.
하지만 나는 왠지 서글퍼졌다.
환자에 대해서 고민하며 밤을 지새우던 그녀의 모습은 어디로 사라진 것일까?
일을
사랑한다는 것이 쉽지 않다는 것 나 역시 인정한다.
애착을 가지고 몰입만 하면 무조건 성공을 할 수 있다고 믿는 것은 아니다.
똑같이 열심히 땀을 흘렸건만 어떤 일에 대해서는 대가가 주어지고 어떤 일에 대해서는 대가가 주어지지 않는다.
똑 같은 일을 해도 운이 좋아 승승장구 하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매번 일이 꼬이는 재수 없는 사람도 있다.
세상은 불공평하다. 불공평함이 반복되다보면 즐거워서 시작한 일도 더 이상 즐겁지 않다.
그동안 내가 쏟은 땀방울이 자랑스럽기는커녕 마치 바보짓을 한 것 같아 씁쓰름하다.
하지만
그래서는 안 된다고 나는 감히 말하고 싶다.
단지 생존을 위해서 어쩔 수 없이 그 일을 선택했다면 어쩔 수 없다.
하지만 내가 선택했고 한 때 사랑했던 일이라면 그 결과에 상관없이 가치가 있다.
아무리 노력해도 대가가 없으면 언젠가는 끝내야 한다.
하지만 사랑하는 일을 하는 동안에는 어떻게든지 열심히 하자.
일을 하는 가운데서 느끼는 보람에 대해서 대가가 안 따른다고 스스로 폄훼하지는 말자.
인간은
뭐가 되었든 사랑하는 대상이 있어야 살아갈 수 있다.
삶의 마지막에 남는 것은 추억뿐이다.
열심히 암기를 해야지 영어단어가 기억에 남듯 추억 역시 기쁜 마음으로 뇌지도속에 자리매김해야 끝까지 남는다.
애착을 가진 일을 통해서 얻는 내 머리 속의 추억은 그 누구도 뺐어갈 수 없다.
누군가에 대한 사랑이 끝나도 추억이 남듯 내가 사랑한 일에 대한 추억도 남게 마련이다.
[출처] 무엇을 아끼고 무엇에 집착해야 하는가? :
최명기(부여다사랑병원장/정신과전문의/[무엇이 당신을 일하게 만드는가]저자)|작성자 artppper